[독후감]『사랑을 믿다』 -권여선
2008 제32회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마지막 페이지를 읽은 뒤 자신이 스스로 주인공이 된 듯 잔잔한 상념들이 밀려왔다. 주인공처럼 나 역시 사랑이라는 단어에 격렬해지기는 너무 나이가 들어버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실연의 상처를 주었고 상처를 받았던 사람이 있었던가, 그리고 그 때마다 난 어떻게 극복해 왔던가 하는 망상을 담배연기와 함께 피웠다.

이 소설은 마치 텔레비전에서 방영될 법한 미니시리즈와 같은 느낌이다. 첫 장면은 주인공이 허름한 술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서서히 화면이 뿌여지면서 그는 과거를 회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전개되고 마지막 장면에서 현실로 돌아온 주인공은 다시 같은 장소에서 시작과 같은 포즈로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모든 이야기는 그의 생각과 느낌이다. 그가 앉아있는 술집은 그와 그의 회상 속에 나오는 실연한 이들의 절망과 상념이 담겨져 있는 이야기 주머니와 같은 곳이다.
주인공이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그녀를 다시 만나 것은 삼년만의 일이다. 당시 그는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그녀와 만나지 않게 되었다. 최근에 그녀를 만난 것은 그가 결혼까지 약속했던 사람이 그를 떠나버린 직후였다. 그녀를 만나 알게 된 사실은 그녀가 삼년 전에 실연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시점에 놀라면서 혹시 상대가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는 그녀로부터 그녀를 처음 이 술집에 데려온 친구와 그녀 자신의 실연 이야기를 듣는다.

그녀의 친구는 실연에 대해서 참으로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다시 결합하고 싶은 욕망과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과의 괴리감에 그녀 앞에서 그저 눈물을 쏟는 것 이외에는 아무 방도가 없었다. 그녀의 실연은 그 친구의 실연보다 일 년이 앞선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떻게 그녀 곁을 떠났는지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주인공이 보는 삼년 전의 그녀에 비해 현재의 그녀는 너무나 쿨하고 무미건조하여 낯설게 까지 보였다. 그는 이런 그녀의 모습에서 그녀의 실연의 아픔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해 볼 뿐이었다. 이성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 없는 듯한 옷차림, 행동과 말투는 그로 하여금 혹시 그녀를 실연시킨 자가 자신이었다면 그녀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었는가 하는 죄책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실연을 극복하게 된 것은 지극히 보잘것없는 평범한 일상에서의 일 때문이었다. 엄마 심부름으로 거의 찾아가지 않던 고모님 댁에 선물로 무거운 단지 하나를 갖다 주게 되었다. 그 집은 허름한 옥탑방이 있는 삼층 건물. 삼층이었고 옥상에는 철학관이 있었다. 고모 집을 들어서자 주인없는 집에 고모 집을 철학관이라고 착각한 여인 세 명이 점을 보기 위해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저마다 희귀병을 앓는 친지를 둔 여자, 손자가 유괴된 여자 그리고 남편이 바람난 사연이 있는 여자들이었다. 그들의 대화는 보잘 것 없는 일상에 관한 것들이었다.

고모부가 귀가해 철학관은 사층에 있다고 하자 모두들 당황하여 밖으로 나온다. 그녀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고모부를 뒤로하고 그들과 함께 나온다. 무거운 선물단지는 놓아 둔 채로. 그리고 "그녀이게 만들었던 본성의 작은 칩도 함께 놓아 둔 채로".
이후 고모부가 자살했고 일 년 후, 바로 일주일 전에 고모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모 집에서 있었던 해프닝은 그녀를 변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실연보다 결코 작지 않는 아픔을 저마다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일상의 보잘 것 없는 일들에 열중하며 살아가는 낯선 그들의 무덤덤함에 그녀는 충격을 받았는지 모른다.
"세상에 죽어도 못하는 게 어딨고 죽어도 꼭 해야 하는 게 어딨나요. 그 말이 그렇게 가슴에 콕 집히는 거예요. ... 살다보면 이건 죽어도 못하겠다. 죽어도 이건 해야겠다 그런 말 많이 하잖아요? 그런데 정말 죽어도 그런 게 어디 있겠어요?"

주인공은 그녀가 해준 그녀의 실연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그녀의 실연의 아픔을 "겉으로는 살 맞는 짐승처럼 꿈틀댔지만, 그 안쪽에서는 표면장력으로 팽팽한 절망의 비커를 붙들고 쓰디쓴 고통을 한 방울도 쏟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보잘 것 없는 일상에 열중한다는 것은 "싱거운 맥주 맛 속에 뾰족한 심처럼 독한 안동소주의 향이 박혀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가 그 술집에 앉아 있는 것은 얼마 전에 실연당한 상처를 달래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새로운 사랑을 시작했다. 그리움과 같은 때늦은 실연과 오지 않을 그녀를 기다리는 야릇한 사랑을 그는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어쩌면 나도 모르게 놓쳐버린 스물아홉의 그녀로 인해 뒤늦은 실연을 앓게 되리라는 생각을 했다. 너무 늦어 격렬하지는 않겠지만 , 격렬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서 입술을 피나게 씹어대진 않겠지만, 희미해진 사진 속 윤곽을 더듬듯 손끝이 닳도록 무언가의 테두리를 하염없이 더듬어나갈 만짐의 세월이 시작되리라는 예감이었다."끝
hearstone
댓글 없음:
댓글 쓰기